5월, 이제 막 꽃이 피기 시작한 우리 동네 입구에 향긋한 꽃내음이 번지는 춥지도 덥지도
않는 저녁이였다. 남편과 척 맨지오니의 콘서트를 보고 즐거운 마음으로 11시가 넘어서 집에
들어오니 아들은 벌써 제 방에서 자려는 중이였다. 그런데 맞은 편 딸아이 방 침대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이들이 모두 들어 왔는지 확인하려고 아들에게 "누나는 왔니?"하고 물으니
아들이 "누나 아까 들어오자 마자 속이 안 좋다며 화장실 들어가서 아직 안 나왔는데요."한다
무슨 일인가 하고 화장실 문을 열려고 하니까 화장실 문이 안 열린다.
잠긴게 아니라 딸애가 화장실 바닥에 드러누워 있어 몸에 걸려 문이 안열리는 것이다.
나는 놀라서 문틈으로 손을 넣어 딸아이를 머리를 들어 겨우 몸을 일으키고 문을 열었다.
아이는 제 정신이 아니였다. 핸드폰은 바닥에 팽겨쳐져 있는데 계속 누구와 통화하는 것 처럼
뭔가를 중얼 중얼거리고 있었다.
변기 안에는 물을 내렸지만 벌써 여러번 속을 개운 표시가 역력한데 아이는 눈이 풀려
제 엄마도 제대로 알아보질 못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속이 얼마나 상하고 부아가 치미는지
딸애 등짝을 때리면 정신 차리라고 소리를 쳤는데도 손만 휘휘 저으며 알아 듣지도 못했다.
솔직히 나는 술을 전혀 못한다. 약한것이 아니라 아예 한 모금도 못한다. 그래서 술 때문에
이렇게 제 몸 하나 못가누는 딸을 보는게 울화통이 터질 지경이였다..
남편도 함께 욕실 안을 들여다 보더니
"그만둬. 술 취한 사람한테 뭐라고 잔소리 해봤자 기억도 못해.
내가 애를 깨워 재울께. 당신이나 얼른 화장 지우고 좀 씻어."
하더니 나를 마구 안방 욕실에 밀어넣었다. 남편도 이런 딸의 모습이 예뻐 보일리 없지만
밤 새 딸애를 혼내면 집 안이 시끄러워 질까봐 미리 막아주는 것 같았다.
나도 역시나 소용없는 것 같아 일찍 잠자리에 들었지만 옆에서 코를 골며 자는 남편과
달리 잠들지 못했다. 속이 안좋은 아이가 물을 먹는 다고 밤새 주방을 드나들며 냉장고 문을
열어대는 발소리가 속으로 끌탕을 치느라 잠도 안오는 나를 괴롭혔기 때문이다.
솔직히 나도 우리 애들이 엄마에게 가르쳐 준 일명 꽐라가 되도록 먹어본 적 있었다. 그 때 꽐라가
된 나를 업고 끙끙대며 집까지 모셔 온 주일학교 선배가 바로 우리 남편이다. 가위바위보에 이긴
다른 선배 하나는 내 가방과 구두를 들고 뒤따라 왔었다. 늦은 밤 아파트 앞에서 내가 안 와오니까
안절부절하며 걱정하고 기다리던 엄마, 즉 지금의 장모에게 나를 넘겨줄 때만 해도 엄마와 남편은
6년 후 둘이 사위와 장모가 될 줄 알았을까?
그때 맥주 500cc에 기절 하는 20살이 된 나를 보고 놀란 남편은 지금까지 나한테 한 번도
술을 권하지 않는다. 나 역시 수학 여행 가서도 먹어보지 않았던 술을 선배들과 처음 먹었던 그날
맥주 한 잔에 만취가 된 후로 술이 가장 무서운 극약이다. 사실 애인도 아니였는데 그런 모습을
보였으니 지금 생각해도 얼마나 창피한지....
나야 이제 옛일이라 좋은 인연 만나려고 그렇게 된 거라 생각하며 살지만 우리 딸에게도 그렇게
좋은 일만 생길리 없다고 본다. 이 세상은 술 취한 여자들에게 얼마나 위험한가?
어차피 잠 못들 것 같아 새벽에 콩나물 국이나 끓여야지 하고 주방으로 나갔는데 딸애가
제 침대가 아닌 거실 소파에 잠들어 있었다.
'에구구 함께 보던 TV 속 만취 여성의 꼴불견을 볼 때마다 같이 욕하더니 지금 저 꼴이란....'
남편 해장국도 모자라 이제 딸 해장국까지 끓여줘야 하니 앞으로 걱정이 절로 되었다.
다음날 딸아이는 아침 먹으며 아무 말로 없었다. 아들은 슬슬 눈치를 보더니 밥을 먹자마자
서둘러 학교로 도망가 버렸다. 남편도 말이 없길래 참지 못하고 내가 나섰다.
"너 맨날 TV를 보면서 니가 놀리는 꽐라 될 때까지 술 먹는다고 험담하더니 너는
그게 뭐냐? 소주, 맥주 마구 섞어 먹었니? 아니면 폭탄주 먹었니?"
"아니예요...... 어제 몸이 안 좋아서 그랬어요."
"누구 누구랑 먹었는데 그래?"
"주일학교 교사들이요. 나도 이럴 줄 몰랐어요."
그 말에 우리 두 내외는 할 말을 잃어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딸은 울상을 한번 짓더니
아침 밥도 한 그릇은 꼬박 꼬박 채워 먹는데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콩나물 국만 계속 떠 먹었다.
술을 많이 먹어보지 못한 딸아이는 아직도 자기 주량을 모르는 것 같았다. 얼마나 먹어야 자기
한도인 줄 모르니 권하면 권하는 대로 먹었는지 모르지만 이런 일에 대해 평소 충분히 대화를
나눴던 것 같은데 엄마의 기대를 여지없이 뭉개는 딸애 때문에 하루 종일 우울했었다.
남편이 "이렇게 한번 배우는 거지 뭐. 집에 들어왔으면 되는 거야. 길에 쓰러져 있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지. 자기가 쓰러질 때까지 먹어봤으니 다시 안 먹을 거야. 그만 잊읍시다." 했었다.
자기도 술먹는 사람이라고 참 속도 좋다. 혹시나 저 딸 바보가 아이를 망치는 것은 아닐까?
나도 모르겠다. 안 먹어보던 술을 억지로 먹고 죽는 애들도 있다는데 이제 대학생인데 술 먹는것
까지 뭐라 할 수 없고 자식은 평생 애물단지라더니....
그 때 왠 총각에게 업혀온 나를 보고 우리 엄마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래서 엄마는 나랑 싸우고
속상할 때마다 " 꼭 너같은 딸 낳아서 고생해 봐라. 이 년아." 했는지도 모른다. 자식 낳아야
부모 속을 안 다더니 지금 나를 보고 친정 엄마는 웃을까? 엄마가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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